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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재(怡養齋)

진주강씨 법전 도은종택(晉州姜氏 法田 陶隱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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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이양재(怡養齋)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21.0x45.3x2.9
  • 건물명 이양재(怡養齋)
  • 공간명 진주강씨 법전 도은종택(晉州姜氏 法田 陶隱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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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재(怡養齋)

이양재(怡養齋)


이양재(怡養齋)는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에 있는 진주강씨(晉州姜氏) 도은(陶隱)종택 사랑채에 걸려 있던 편액이다. ‘이양’은 기쁜 마음으로 어버이를 봉양한다는 뜻으로, 『맹자』, 「이루離婁」 상권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증자(曾子)가 아버지 증석(曾晳)을 봉양할 때는 반드시 술과 고기를 올렸는데, 상을 물리면 남은 음식을 누구에게 줄 것인지를 반드시 여쭈었고 “남은 것이 있느냐?”라고 물으면 반드시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증석(曾晳)이 죽자 증원(曾元)이 아버지 증자(曾子)를 봉양할 때는 반드시 술과 고기를 올렸는데, 상을 물리면 남은 음식을 누구에게 줄 것인지를 여쭙지 않았고 “남은 것이 있느냐?”라고 물으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을 다시 아버지께 올리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이른바 ‘입과 배를 봉양하는 것 [養口體]’이다. 증자(曾子)처럼 해야 ‘뜻을 봉양한다 [養志]’라고 할 수 있다. [曾子養曾晳 必有酒肉 將徹 必請所與 問有餘 必曰有 曾晳死 曾元養曾子 必有酒肉 將徹 不請所與 問有餘 曰亡矣 將以復進也 此所謂養口體者也 若曾子則 可謂養志也]”라고 하였다. 이는 어버이를 진정으로 봉양하는 길은 증원(曾元)이 아버지 증삼의 구체(口體)를 봉양하는 저급한 것이 아니고 증삼(曾參)이 아버지 증석(曾晳)을 봉양한 것처럼 어버이의 뜻을 이해하여 그 마음을 즐겁게 해 드려야 함에 있다는 말이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행서체이다.

작은 편액에 능숙하고 굳센 필세가 시원하다. 작은 공간 속에서도 넉넉한 여유가 돋보인다. 쭉쭉 뻗은 필획은 맑고 청초하여 수선화를 보는 듯하면서도 거슬러 들어가는 기필에 철심 같은 골기가 있다. 그 사람의 맑고도 강직함이 배어나온 것이리라. 심지어 나란히 중복된 파책의 필세마저 어버이 앞에 나이든 자식의 재롱처럼 늘어서 있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진주강씨 법전 도은종택(晉州姜氏 法田 陶隱宗宅) 소개


진주강씨(晉州姜氏) 법전 문중의 세거지인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은 문수산과 태백산을 끼고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안동부 춘양현에 편입되었다가 순흥부에 속하기도 하였다. 진주강씨가 법전에 터전을 마련하게 된 계기는 한산군수를 역임한 강덕서(姜德瑞, 1540~1614)의 후손인 강윤조(姜胤祖, 1568~1643)와 그의 두 아들 잠은(潛隱) 강흡(姜恰)과 도은(陶隱) 강각(姜恪)이 병자호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법전리로 입향하면서부터이다. 강흡과 강각은 부모님을 모시고 1636년(인조 14) 12월 파주 교하에서 출발하여 1637년(인조 15) 1월 매창(梅窓) 정사신(鄭士信)의 조카사위인 권산기(權山起)의 시골 농장이 있는 법전리 성재미[성잠星岑]에 우거(寓居)하였다. 법전 진주강씨는 음지마을과 양지마을로 나뉘어 마을의 토대를 형성하였는데, 양지마을에는 주로 소론으로 활동했던 강각의 후손들이 거주하였고, 음지마을에는 노론의 당색을 띠었던 강흡의 후손들이 거주하면서 명실상부한 진주강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양지마을에는 도은종택과 해은구택 등이 있으며, 음지마을에는 기헌고택과 경체정 등이 있다.

법전은 괴리 또는 유천이라고 하는데, 법전이라는 지명은 법흥사라는 사찰 앞에 있던 큰 밭을 지칭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나 법전천의 옛 이름인 유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즉 유(柳)자의 훈인 ‘버들’이 ‘법(法)’으로 변해 법계(法溪), 법전천(法田川)으로 변했다는 설명이다. 강흡과 강각 형제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숭명배청의 대명의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파주로 돌아가지 않고 법전에 정착하였다. 이들 형제는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 포옹(抱翁) 정양(鄭瀁), 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 손우당(遜憂堂) 홍석(洪錫) 등과 함께 태백오현(太白五賢)으로 칭송되어 숭정처사(崇禎處士)로도 불렸다. 또한 강각은 태백오현에 더하여 태백육은(太白六隱)으로 일컬어졌고, 중국 동진 때의 시인 도잠 도연명의 ‘도(陶)’를 따서 ‘도은(陶隱)’이라 자호하였다. 남송을 인정하지 않아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채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은거했다는 도연명의 이야기는 버드나무를 신하의 충절에 빗대는 전통을 낳았다. 따라서 입향조인 강흡과 강각 형제가 견지했던 숭명배청의 의리가 도연명의 고사와 상통하여 법전천의 어원인 유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법전마을은 태백산을 향해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인 비룡승천형의 풍수지리학적 특성을 보인다. 여기에 법전면 풍정리와 봉성면 창평리 사이에 있는 갈방산과 가마봉이라는 두 개의 문필봉을 끼고 있어 문과 급제자 25명(음지마을 13명, 양지마을 12명), 무과 급제자 2명, 소과 합격자 31명과 고시 합격자 13명, 그리고 박사와 학자들을 대거 배출하여 영남의 명문가로서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도은종택은 현재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675년(숙종 1) 강각의 장자 성건재(省愆齋) 강찬(姜酇)이 안채를 지은 이후 사랑채 등을 증축하여 안채, 사랑채, 재청, 사당, 별묘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1798년(정조 22)경에 도은의 6대손인 유계 강명규가 중수하였으며 근래 일부분을 수리하였다. 안채는 중앙 정면 3칸 대청의 좌측에 윗방과 안방, 부엌을 두고, 우측에 고방, 작은 사랑방을 둔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된 ㅁ자형으로, 산돌로 높게 기단을 쌓아 건물을 올렸다. 현재 안채는 성건재 당시의 것으로 종택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대청 우측 작은 사랑방에 계자난간을 두른 누마루는 후대에 설치하였다. 안채 앞에 있는 사랑채는 정면 5칸 반, 측면 1칸으로 되어 있으며 문간과 문간방, 사랑방과 마루, 툇마루로 이루어진 일자형 구조이며 툇마루에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종택 좌측에 심어져 있는 산배나무는 수령이 350여 년이나 되었다.

참고문헌
  • 진주강씨 법전문중 응교공 종회, 『진주강씨 법전문중지』, 2015.
  • 김정미, 『진주강씨 법전문중 도은종택 및 석당공』,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국학자료목록집 41, 2017.